1971년 대한항공 HL5012 여객기가 김상태의 폭발물 협박으로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공군의 위협 사격과 승무원들의 용감한 대처로 강원도 고성군 해변에 불시착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971년 대한항공 KAL기 납북미수 사건 개요
1971년 1월 23일, 대한항공 소속 HL5012 여객기가 강원도 속초에서 서울로 향하던 중 강릉 상공에서 “북으로 기수를 돌려라!”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이 협박은 승객으로 가장한 괴한 김상태(당시 23세)가 1만 피트 상공에서 폭발물을 들고 위협한 것이었습니다.
김상태는 폭발물을 이용해 비행기를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지만, 공군의 위협 사격과 기내 승무원들의 신속한 대응으로 비행기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초도리 해변에 불시착했습니다.
비행기에는 55명의 승객과 5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으며, 비행기 불시착 후 폭발물이 터지면서 몇 명의 승객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김상태의 범행 계획과 폭발물
김상태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범행에 사용된 폭발물을 준비했습니다. 범행에 사용된 폭약은 김씨가 친구 황모, 정모, 조모 등의 도움을 받아 제조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던 강모군에게 5000원을 주고 폭약 제조 기술을 배워 어선 엔진에서 사용하는 발동기 시동화약과 어린이 딱총용 화약으로 폭발물을 만들었습니다.
이 폭발물을 이용해 비행기를 납치하려 했으나, 기내 승무원들의 적극적인 대처로 범행은 미수에 그쳤습니다.
승무원들의 용감한 대처와 김상태 제압
당시 비행기 납치를 막기 위해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군의 위협 사격으로 김상태가 흥분하자, 기내 안전관 최천일씨는 뒷자리 승객들에게 북한에 도착한 척 울음을 터뜨리라고 요청했습니다.
김상태가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틈을 타 최씨가 사격을 가해 김씨를 제압했습니다. 이후 수습 조종사 전명세씨가 김씨와 몸싸움을 벌이며 김씨가 들고 있던 폭발물이 터지자 자신의 몸으로 폭발물을 덮쳤습니다.
보안당국의 허술함과 사건의 교훈
이번 사건으로 당시 보안당국의 허술함이 드러났습니다. 김상태가 비행기에 폭발물을 반입할 수 있었던 것은 검문 과정에서 휴대품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씨가 들고 있던 검은색 비닐 가방에 사제 폭발물이 들어 있었지만, 공항에서 이를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1969년 납북 사건 이후 도입된 금속탐지기도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대한항공이 도입한 문틀형 흉기탐지기는 접적지역 공항에는 배치되지 않았으며, 속초공항에 배치된 구형 탐지기는 비닐이나 기름종이로 싸면 탐지가 어려웠습니다.
1969년 납북 사건과 그 이후
1971년 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1969년 대한항공 여객기 YS11 납북 사건은 아직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YS11 여객기는 강릉에서 김포로 향하던 중 납북되어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북한은 1970년에 승객 50명 중 39명을 송환했지만, 승객 7명과 승무원 4명 등 11명은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지난해 2월 13일, 가족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기다렸다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보안 강화와 더불어 납북 피해자들의 송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