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밀 침투 작전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한 요원들은 나이도, 출신도, 직업도 다르고 서로 만나본 적도 없는 ‘평범한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지만, 눈을 감는 날까지 ‘극비 프로젝트 요원’이었던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냅코 프로젝트: 잠입과 도전의 서막
1944~45년, 미국 OSS가 시행한 ‘냅코 프로젝트’는 잠수함과 낙하산을 이용하여 한반도에 특수요원을 파견하는 특수작전이었습니다. 이는 정보수집과 거점확보를 목표로 했으며, 중국의 광복군과 협력하여 대일 작전의 일환으로 이뤄졌습니다.
당시 미주지역 재미한인들은 애국의 사명을 품고 대일 작전에 적극 참여하며 냅코 프로젝트에 기여했습니다. 이 작전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재미한인들이 중국의 임시정부나 독립적인 부대를 결성하여 미군에 참전을 요청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의 연결고리가 형성되었으며, 냅코 프로젝트는 이승만을 통해 한인들과의 협력으로 이뤄졌습니다.
냅코 프로젝트의 투입과 실패
작전은 1944년 중반에 본격화되었는데, 장석윤 등 19명의 한인 요원들이 참가했습니다.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작전을 준비했는데, 연령별로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투입되었습니다.
변일서는 대일전 참전을 위해 합의이혼을 선택하고, 이근성은 사마귀 제거 성형수술을 받으며 침투를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한 섬에서 훈련을 거쳐 임무에 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작전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들의 실제 전투 기록은 미미했지만, 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재미한인들의 독립운동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들의 항일투쟁활동은 90년대에 방선주 박사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일한 등 5명뿐이었습니다.
냅코 프로젝트의 역사적 의의
‘냅코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이들의 헌신은 재미한인들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의 노력과 희생은 대모험을 시도하고자 하는 용기와 의지를 보여주며, 역사 속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