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참몰사건”은 1945년 8월 22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때 우키시마호(浮島丸)라는 배가 일본에서 출발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던 중 해상에서 폭발하여 침몰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많은 한국인들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키시마호 침몰에 대한 당시 상황
우키사마호 사건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키시마호 출항과 이상한 정황
1945년 8월 22일, 한국인들을 위한 귀국선으로 나온 우키시마호. 조선인들에게는 뱃삯이 공짜인 파격적인 제안으로 수천 명이 일본 오미나토항에서 집결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수상한 행동과 함께 배에는 의문의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우키시마호의 승객과 탑승 상황
우키시마호, ‘떠다니는 섬처럼 큰 배’로 불리는 이 귀국선은 타이타닉의 10분의 1 크기에도 불구하고 4000명에 이르는 한국인 승객을 태웠습니다.
한국인들은 좁고 더운 객실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4일간의 항해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8월 24일, 배는 부산이 아닌 마이주르만에 도착하게 되고, 순조로운 귀국은 불투명한 상황 속으로 진입합니다.
폭발과 참상의 시작
우키시마호가 마이주르만에 도착하던 중,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이 나버립니다.
수백 명이 갑판에서 바다로 추락하고, 아래 선실에 갇힌 수천 명은 바다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원합니다. 생존자들이 목격한 참상은 일본 해안가를 강타한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생존자와 희생자의 운명
주민들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몇몇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들의 명단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고, 생존자들이 전한 일본 측의 무관심한 대응은 안타까운 일로 기억되었습니다.
사고 발생 한 주 후, 희생자들의 시신은 기름에 덮여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처리되었습니다.
사건 후 이면의 비밀
일본 정부는 사건의 신원 확인과 장례에 무관심했으며, 생존자들은 “시신을 끌어갔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전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스터리와 비극,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불명확한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그 이면의 비밀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한 미스터리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1. 선전된 귀국선과 실제 우키시마호의 정체
우키시마호 사건에서 한국인들이 서둘러 배에 올랐던 이유는 당시 일본군이 ‘이 배가 한국으로 가는 마지막 배’라고 선전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키시마호는 급조된 첫 번째 귀국선으로, 한국 귀국선은 9월 중순부터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생존자들은 민간선박이었던 우키시마호가 해군으로 전환되면서 무기를 싣게 되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2. 마이즈루만 도착과 의문의 항로
사고 당일, 왜 우키시마호는 부산이 아닌 마이즈루만에 도착했는지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오미나토항에서 출발한 배가 왜 마이즈루만으로 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함장은 사고 전에 “8월 24일 저녁 6시 이후에는 항해하지 말고 가까운 항구로 들어갈 것”이라는 명령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며 해당 항로를 계속했다고 주장했습니다.
3. 폭발의 의도적 가능성과 사고 규모 축소 의혹
우키시마호가 침몰된 후에는 일본 정부가 발표한 폭발 원인에 대한 의문이 나왔습니다. 선체의 찢기는 방향이 반대로 나타나면서 생존자들은 외부가 아닌 배 내부에서 폭발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사고 규모에 대한 일본 해군의 집계가 사망자 수를 축소하고 몇천 명의 한국인 실종자들을 감추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한 드러난 점
일본에서는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몇 가지 드러난 사실들이 있습니다.
출항 명령과 함장의 반발
1977년 TV 방송에서 우키시마호의 도미우리 함장과 승조원들이 갑작스럽게 조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반발한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습니다.
함장은 오미나토를 떠나지만 부산으로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이로 인해 마이즈루로 향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실제 우려와 위기 상황
일본 정부는 합리적인 근거 없이 급조된 귀국선을 만든 이유로 ‘한국인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아오모리현에서 소련군의 진출이 예상되어 일본은 여러 방면에서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많은 강제 동원된 한국인들이 있었고, 소련군에 합세할 가능성이 높아져 빨리 내보내야 할 판단이었습니다.
출항 거부와 미군 기뢰 위협
함장과 승조원들은 출항 명령에 거부감을 품은 이유로 전쟁 후에도 바다 여기저기에 투하된 미군 기뢰 때문에 항해가 위험했고, 부산으로 가면 포로로 붙잡힐 우려가 있었습니다.
일본해군 사령부는 함장을 위협하며 사실상 배를 억지로 출항시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함장과 승조원 중에 부산으로 항해한 경험이나 목적지 설명을 할 수 있는 인원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